반 강제로 시작한 디지털 노마드의 삶(?)

노트북과 셀룰러 터지는 휴대전화 하나만 들고 다니는 삶.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업무를 처리하는 라이프스타일. 디지털 노마드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모습입니다. 의도는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런 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방이 사라졌거든요(?)

집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

잠시 어릴 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렵게 구한 아파트에 입주하여 내(우리 가족의) 집 마련의 꿈을 이룬 후에 몇 년 평온히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평화였습니다.

2008년 즈음 부터 아파트를 재건축한다는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얼핏 보면 좋은 소식 같았습니다만, 입주자 의사결정 기구인 재건축 조합은 이미 소수의 인원들에 의해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있었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재건축이 확정되기까지 근 10년 동안 잡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집이 갑자기 찾아온 사람들에 의해 회의장이 되는 것은 물론, 단지 내에서 싸움이 잦게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감정가 만큼의 매매 대금을 받고 집을 나왔습니다.

2018년 겨울, 살던 집 근처로 급하게 전세를 얻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사 온 지 두 달 즈음, 전세 사기를 당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전 날 즈음이었으니, 최악의 선물이었습니다. 폭탄을 돌려막다 집을 압류당한 집주인과, 그것을 함구하고 도망가버린 이전 세입자의 합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음..

1년간의 기나긴 민사소송과 드라마같은 몇몇 에피소드 끝에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집은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급한대로 월세로 들어가 정착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집은 참 괜찮았지만 1년 조금 넘게 살다 보니 월세가 부담되어 다른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무렵에는 이미 이사의 달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상 생활 중에도 본능적으로 이사를 대비해 물건들을 모듈화시키고 분리했습니다. 이삿날 아침이면 편의점으로 가서 컵라면을 먹고 새 집으로 가서 멍을 때리며 앉아있었습니다.

이사도 지겹고, 이곳에는 정착하려나 싶었는데 두 달만에 방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하수관 역류로 방이 침수되어 버린 겁니다. 오후에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가 이불이 물에 잠겨 깼습니다. 물이 1cm 가까이 고여 하마터면 책상 뒤의 멀티탭이 물에 잠겨 자다가 즉사할 뻔 했습니다. 급하게 빗자루와 걸레로 물을 빼내고 바닥을 박박 닦았으나(샤워한 물 같았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흑..

다시는 나무로 된 마루 안 쓸겁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일을 벌였습니다. 가구를 다 뺀 뒤 마루를 뜯어냈습니다. 물에 불은 나무 마루를 뜯어 내니 썩은 물 냄새가 코를 습격했습니다. 곰팡이도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아 노트북과 휴대전화, 충전기만 들고 거실로 도망나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의외의 장점

통화할 공간 하나 없는 ‘난민’ 생활. 참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래도 모든 것을 포기하니 좋은 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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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수 전 모습입니다.

방은 재실 인원이 거의 항상 1명 이하로 유지되는 ‘폐쇄적’ 공간입니다. 반면 거실은 방과 화장실 사이에 위치해 통로가 되기도 하고 가족들의 생활 공간이 되기도 하는 ‘개방적’ 공간입니다. 사방이 열린 곳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주변 소음에 저항성이 생겨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집중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페나 맥도날드에서 책이나 노트북을 펴 놓고 앉아 있으면 공부가 잘 되는 것 처럼, 거실이라는 ‘이질적’인 공간에서 가족들이 움직이는 ‘화이트 노이즈’에 노출되어 있으니 능률이 올라갔습니다.

열린 공간에 있으니 나만의 세상에 과하게 빠져드는 일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방에 갇혀서 코드만 짜다 보면 종종 살아있음에 대한 인지가 희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모든 것이 코드로 보일 정도로 깊게 몰입해 버린 것이죠. 하지만 가족이 거실에 있는 이상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시간이나 식사 이야기,소소한 일상 같은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일에만 빠져있는 상태를 벗어나 잠시 숨 돌릴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몰입 상태를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기에 혼자만 알아보는 코드가 아닌 상식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코드를 작성하게 되는 점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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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되는 것도 좋습니다. 방에서 커튼을 닫고 있으면 매일 자는 시간이 30분 정도씩 늦어져 결국에는 새벽에 취침해 오후에 일어나게 됩니다. 심해지면 반대편 시차에서 활동하는 사람과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채 한 시간이 안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실에서는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소음과 빛으로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상과 다르게 새벽보다 이른 아침에 더 행복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코드를 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쉬운 점들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완전히 혼자서 조용히 있는 시간이 있어야 정신이 메마르지 않는데, 사적인 공간이 없어지니 이 부분이 좀 아쉽습니다. 다만 거실도 시간의 변화에 따라 잠들 무렵에는 고요한 사색의 공간으로 변하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원래 사용하던 책상을 버리고(?) 나와서 식탁에서 작업하고 있기 때문에 달라진 높이에 적응하는 것이 조금 어렵습니다. 높이가 너무 낮아서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니 소화불량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자를 최대한 낮추어 쓰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가 주는 교훈(?)

지난 며칠간 겪은 감정과 능률의 변화는 마치 방에서 작업하다가 사무실에 출근해서 작업할 때와 비슷합니다. 방에서 한참 있었으니 밖에서도 한참 있어보는, 어찌 보면 신선한 기회입니다.

그동안 똑같은 집이라는 공간에서 살고 있었음에도 위에 나열한 장점을 누리지 못한 것은, 사적인 휴식의 공간과 일의 공간을 분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분리되어 있을 때가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생활이 유지되기는 하지만, 하나라도 결핍되면 언젠가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영영 쉬기만 하거나 영영 일하기만 하는 것 둘 다 좋지는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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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집중은 강의 중에 딴짓 할 때가 가장 잘 됩니다…

아무튼, 이번 일로 별도의 작업 공간이 필요한 이유를 알았습니다. 노트북만 있으면 딱히 하던 일에 지장이 없다는 것두요.

마치며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 능률이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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