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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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처음으로 키보드가 잘 안 눌리는 문제를 경험했다. 키감이 전혀 없었다. 며칠이 지나니 증상이 사라져 있었다. 조금 지나 다른 키에 문제가 생겼다. 두 번씩 눌렸다. 의도와 달리 글자가 두 번씩 나가니까 계속 지워주는게 귀찮았다. 몇 주 전부터는 스탠드와 접촉하는 하판에 긁힌 자국이 나기 시작했다. 스탠드를 탓했다. 소중한 맥에 상처를 내다니? 그런데 원인은 다른 데에 있었다. 며칠 전 맥을 들고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책상에 내려놓는데 얘가 네 발로 서지 못했다. 하판이 책상에 죽 죽 긁히는 소리가 났다. 하판이 부풀었다.

배터리가 부풀어 버렸다. 리튬 배터리에게 드문 일은 아니다. 5년 전 구입한 아이팟은 2년도 안 되어 배터리가 팽창해 액정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교체 후에도 3개월도 안 되어 동일 증상이 재발했다. 원인은 너무 오랜 기간 완충 상태에서 고온으로 방치해둔 것이었다. 집에서 충전기에 연결된 상태로 여름을 보내고 나니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애플 지원에 문의하니 즉시 사용을 자제하고 공인 서비스 센터로 방문하라고 안내받았다. 하지만 방문까지 남은 그 나흘간 사용을 자제할 수는 없었다. 배터리 폭파나 액정 파손과 같은 치명적인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가능성도 매우 낮았거니와(아이팟은 배터리가 부푼 채로 3년을 무사히 지나갔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하여 일단 급한 것들을 처리하고 백업을 마친 후에 애플 가로수길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달렸다. 집에서 킥보드 타고 가도 되는 거리에 위니아에이드도 있고 유베이스도 있었지만, 애플스토어의 지니어스바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도착하니 양쪽으로 줄이 나 있었는데, 왼쪽은 나처럼 예약하고 온 사람들, 오른쪽은 방문객이었다. 감염병 예방 차원에서 매장 정원을 통제하는 중이었던 것 같았다. 예약 패스를 보여주고 2분 정도 후에 매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새 아이폰 출시 시즌임에도 사람이 별로 없어 한적한 모습이 매우매우 낯설었다. 자리에 앉아 있으니 지니어스가 다가와 이것저것 물으며 수리를 안내했다. 배터리가 부풀어 하판 탑케이스 교체가 필요한 상황이며, 배터리 이슈에 한해 구매 후 3년간 보증 대상이기 때문에 청구되는 비용은 없다고 했다. 안내하면서 맥에 전기와 인터넷을 공급하고는 진단 프로그램 같은걸 돌리더니 무언가를 작성하였다. 재고가 있으니 하루 정도 걸릴 거라고 하였다. 생각보다 짧았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나왔다.

맥을 타인의 손에 맡기고 돌아온 적은 처음이었다. 타인에게는 그냥 노트북 같아 보이겠지만 나에겐 나름 애착의 대상이었던 터라 돌아오는 길이 조금 씁쓸했다.

오늘은 맥을 맡기고 온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맥이 수행하던 기능을 다른 기기로 나누고 있다. 코딩은 안하고 있고, 앱 피드백 수집은 폰으로 충분하고, 이 글도 폰으로 쓰고 있다. 아까 저녁에 담당 지니어스에게 연락이 왔는데, 하루 더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오늘 자고 일어나 오전 즈음이면 픽업 가능한 상태가 될 것 같다. 언능 데려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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