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대 머리맡
따뜻한 빛이 좋다. 은은한 촛불빛 조명을 켜놓고 혼자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열리고 몽글몽글한 생각들이 피어난다. 어쩌면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새파랗도록 하얀 빛 뿐인 공간들로 가득 찬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따뜻한 진짜 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돌이켜 보았을 때, 두 개의 세상을 오가며 살아왔다. 하나는 차분한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생업과 현실의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나인 채로 내면에 손을 뻗을 수 있는 이상과 낭만의 세상이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을 보고 있으면 낭만을 꿈꾸며 삶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
공간과 조명 하나로 이토록 달라지는 세계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얼핏 지나가다 본 작가 한강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저에게 서재는 ‘전화 부스다.’ 이렇게 생각해봤어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서 유리문을 닫으면 바깥세계가 보이긴 하지만 소리는 차단되잖아요. 그곳에서 수화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며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는 그런 공간인데요. 서재는 대부분 죽은 사람들 또는 지금 옆에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꽂아놓고 펼쳐보는, 세계의 한가운데지만 조금은 떨어져 있는 그런 곳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출처
세계의 한가운데지만
조금은 떨어져 있는 곳.
우주에 어찌 하나의 세계만 있겠는가. 책장에 꽂혀 있는 수백 수천개의 세계를 유영하며 작가는 하나인 현실 너머의 무수히 많은 삶을 드나들 수 있었나보다.
나에게도 서재같은 곳이 있었다면 바로 “내 방”이다. 집에서 혼자 쓸 수 있는 방이 생긴 시기는 대략 중학교이 될 무렵 즈음인 것 같다. 베란다와 연결된 창문이 있고, 체리 몰딩에 동그란 형광등이 있는, 지극히 평범한 구축 주택 안방이었다.

천장 등을 켜놓으면 어두워서 책상 등을 켰다.
처음에는 주어지는 대로 살았는데,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방은 충전과 치유의 공간이어야 했고 낭만과 맞닿아 있아야 했다. 그 때부터 천장을 차지하는 시퍼런 형광등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따뜻한 카페 같은 아늑한 분위기를 내 방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구축 가정집에 형광등은 당연한 것이었다. 주 조명으로 3000K를 쓰는 곳은 주로 상업 시설 위주였다. 가족들의 반대도 극심했다.

산책하다가 닿은 북촌 어느 골목
하지만 조명 하나만 바꿔도 공간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마법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낮에는 발걸음이 잘 닿지 않을 평범한 골목도 밤이 되어 가로등이 켜지면 은은하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머금었다. 도시의 야경이 아름답듯이.

LED 스트립과 T5 조명을 달았다.
조명을 바꾸니 고요한 빛이 내려앉은 공간에서 밤은 이제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 사색과 사유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이 온화해졌다. 상상 속에서 더 높이 그리고 멀리 여행했다.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해내기도 좋았다. 지금까지 작성한 대부분의 글과 코드도 이 따스한 세상에서 나왔다.

자취방 책상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던 2022년에도 자취방을 예쁘게 꾸며놓았다. “퇴근하고 싶은 집”이었다. 일하면서도 집이 너무 예뻐서 집 생각 나게. 덕분에 집에 오면 푹 쉴 수 있었다. 마음이 기거하는 안식처였다.
이렇게 마음이 쉬어가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군대에 오고 나면서부터이다. 지금 살고 있는 생활관도 아쉽지 않게 꾸며 두었지만, 밤이 되면 피곤해 잠들기에 바빠 조명을 켜놓고 사색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살아가다 보면 마음에 얼룩이 묻고 보풀도 일어나기 마련인데, 이걸 떨쳐내고 다시 깨끗하게 시작할 여유가 일상에 없었다.
지금은 다시금 나를 찾으려 노력 중이다. 다행히 요즈음 연휴가 많아서, 자기 전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무너져내린 것들을 하나씩 일으켜세우고 멈춰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보려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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