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는 외향견이었던 것 같다
 나무는 외향견이었던 것 같다
MBTI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나의 마음 또한 홀라당 가져가버린 이후로 내 눈에 사람들은 두 부류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향인과 외향인.
그간 나는 내가 내향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람보다는 컴퓨터랑 친하고, 딱히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 조용한(내 생각엔?) 범생이였다.
그러던 것이 대학에 와서 신나게 놀러 다니니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 1학년 여름 어느 날에 처음으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강하게 느껴 보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매일같이 시끌벅적한 교실에서 다같이 있다 보니 사람이 적을 틈이 없었다가, 어른이 되어 대학생이 되고 이제 내가 직접 만나러 가지 않으면 얼굴 보기도 쉽지가 않은 상황이 되니 주변에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차츰 사람이 귀한 것을 깨달아가는데(외향) 아직 인간관계 스킬은 부족하여(내성) 쟤랑 놀고싶은데,,힝(쭈굴) 상태로 꽤 오랜 시간 지냈던 것 같다. 이 때 즈음부터 나에게 내재된 외향성을 인지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내향인이라는 확신이 더 컸다. 왜냐하면 진짜 E들 사이에서는 기가 쪽쪽 빨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삶을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지는데, 최근에 집에서 혼자 뭘 한 시간보다 누구랑 떠들거나 밖에 나가서 돌아다닌 시간이 훨씬 많은 것이 아닌가. 예전 같았으면 일주일동안 집에 콕 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천국이었겠지만 이제는 하루라도 누구를 만나거나 전화라도 하지 않으면 심심해 죽겠는 사람이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개발자스럽게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보았다.
1. 내향인이 사람들에게 치여서(?) 외향인이 되었다.
 설득력있는 가설이다. 자꾸 사람들 무리 속에서 부대끼고 또 연애도 하면서 치이고 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향 성향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2. 내향인 맞다.
 나가는걸 좋아는 하는데 집에 돌아오면 기가 빨려있는 걸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또 집에만 가만히 있는다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지는 않다. 나와 주파수가 비슷한 사람과 함께할 때에 가장 충전되는 기분이 든다.
3. 원래부터 외향인이었다. 내성적이었을 뿐.
 현재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인간관계가 미숙하고 자신감이 적어서 조용히 살다가 이제 더이상 그러지 않게 된 것. 예전과 비교하면 주변에 정말 좋은 사람이 많이 생겼고, 나를 나 그대로 봐주는 사람도 곁에 있다. 그리고 이제 어디가서 개발자라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쌓이기도 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아가 단단해진 것 같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더이상 내향인 스테레오타입에 걸맞는 사람은 아니게 된 것 같다. MBTI 검사를 하면 내향 쪽으로 약간 쏠려있긴 한데 그 정도가 51% 수준이라서 이걸 정확히 표현하려면 외향/내향 말고 양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게 맞을 것 같다.
아무튼 외향과 내향 그 사이 어딘가에 끼어서 생각보다 시끄럽고 예상 외로 기빨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왠지 나는 내향인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조용하고 진중하고 낭만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일단 지금은 글른 것 같지만 언젠가는 비슷하게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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