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녀석을 봤다. 성당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덥수룩한 털이 얼굴을 덮고 있었지만 그리 지저분한 상태는 아니었다. 엄마에게 달려가 이 녀석을 키우자고 떼를 썼고, “나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렇게 인간이 아닌 두 번째 가족이 되었다. 그 이후로는 주욱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적어도 가족과의 사별 같은 것을 염려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어느 날 나무의 배에서 동그란 혹 같은게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혹이나 종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혹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불안해진 우리는 나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의사는 수많은 그나마 희망적인 경우의 수들 사이에서 우리의 가장 암울한 예측을 사실로 못박아주었다. 유선 종양이고, 3개월밖에 살 수 없다. 나이 때문에 수술은 어렵다. 병원에서 들을 수 있는 말들 중에 가장 최악이었다. 그리고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다. 녀석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로 조금 숨이 가빠진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평소에 애써 꾹꾹 눌러 담아 놓았던 죽음과 이별에 대한 공포가 서서히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죽음을 앞둔 생명을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평소대로 눈 마주칠 때마다 제발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을 눈빛에 눌러담아 전할 뿐이었다. 엄마는 꾸준히 병원에 다니며 진통제를 받아와 정성스런 식사와 함께 준비해주었고 아빠는 녀석의 종양이 곯아 터질 때마다 상처를 소독하고 드레싱을 교체해주었다. 어느 날은 산책을 나가 뛸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았고, 어느 날은 조금 숨이 차 보였다. 선고받은 3개월 즈음이 되어 병원에 가 다시 검사를 해보니 의사는 깜짝 놀라며 예상보다 경과가 좋다고 했다. 죽음은 다시 조금 먼 미래로 미뤄졌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작년에 나는 집을 나왔다. 가족과 반 즈음 절연을 선언하고 자취를 시작한 이후에도 종종 들려오는 소식은 대부분 엄마와 나무의 건강에 대한 것이었다. 엄마는 고관절에 인공관절 치환술을 받았고, 나무는 상태가 많이 악화되어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한다고 했다. 가족을 외면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내면의 모순을 참을 수 없어 가끔 주말이나 퇴근 후에 본가에 들르곤 했다. 먼지쌓인 내 방과 불 꺼진 조용한 거실. 어둡고 깊은 죽음의 기운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 생명의 활력을 보급하기보다는, 그냥 도망치기를 선택했다. 나무는 그곳에서 힘든 투병생활을 지속했다. 상처가 터져서 고름이 계속 나오고 아물지를 않았다. 진통제를 아무리 써도 몸을 바들바들 떨 정도로 힘들어했다.
녀석의 마지막 1년에서 내 눈에 직접 남은 기억은 많지 않다. 내가 도망쳐 있는 동안 녀석과 가족들은 고통의 시간을 뜬 눈으로 맞이했다. 가을이 들어 공기가 차가워질 즈음 녀석은 물도 마시기 힘들어했다. 가족들은 그동안 나무의 치료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알아보았다. 외과적 처치로 유선을 통째로 들어낼 수 있는데, 절제 부위가 너무 커서 봉합이 안 될 수도 있고, 혹여나 재발할 가능성도 크며,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투병 기간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이미 암이 폐와 간까지 전이되어 더이상 손쓸 수가 없었다.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채였다. 그 무렵 나는 엄마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음날 회사는 오후 반차를 내고 학원에도 오프를 냈다. 이른 오후에 퇴근하고 바로 택시를 타고 본가로 향했다.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무는 나를 반기며 꼬리를 흔들었지만 평소처럼 헥헥대며 달려오지는 못 했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 했다. 아니,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 했다. 처음 보는 모습에 깜짝 놀라면서도, 나무가 그렇게 되기까지의 기억이 비어있는게 한스러웠다. 떠나있는 동안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나는 거실에 앉아 망연자실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내 엄마는 형과 함께 짐을 챙기고 나무를 품에 안았다. 우리는 집을 나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떠났다.
병원은 대형마트에 입주한 작은 동물병원이었다. 몇 년간의 투병생활 동안 함께한 곳이었다. 보호자들은 저마다 다른 사유로 자신의 가족들을 데려왔다. 우리는 나무를 품에서 내려놓고 의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청진기로 소리를 듣더니, 표정이 굳었다. 많이 안 좋다고 했다. 가망이 없다. 고통을 멈춰주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최소한 그것만은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의사는 먼저 마취제를 주입했다. 그리고 빨간 딱지가 붙은 새 염화칼륨을 한 통 개봉해 주사기에 채워넣으며, 우리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다. 가족들은 저마다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내가 그렇게 발음이 뭉개지고 괴상한 목소리가 나올 줄도 모르고 나무를 꼭 껴안은 채 잘 자라고 짧게 속삭여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어내리며 반 즈음 뜬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곧이어 녀석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다시 택시를 탔다. 한참을 달려 도착하니 사람들이 마중나와서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간단한 접수 절차를 거친 다음 테이블에 앉아 기다렸다. 아직 따뜻한 나무가 누워 있는 종이 박스를 앞에 두고 바라보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혹시나 싶어 박스를 열어서 들여다보곤 했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우리를 반겨줄 것 처럼 평화롭게 잠든 모습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너무나도 명백한 눈 앞의 증거에 몇 번이고 무너져내렸다. 이윽고 우리는 자그마한 애도의 공간으로 이동해 나무의 생전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을 열고 제일 아끼는 카메라를 꺼내 필름에 녀석의 모습을 그려 주었다. 그리고 녀석은 털복숭이에서 뼈가 되었다가, 가루가 되었다.
유골함을 들고 다시 먼 길을 달려 본가에 돌아왔다. 엄마는 방에 돌아와서야 품에 꼭 안고 있던 유골함을 내려놓았다. 집에 있던 네 발 친구들은 함께 나갔던 나무가 보이지 않자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했다. 나무가 없는 집은 허전했다. 늘상 돌아오면 누구보다 크게 짖으며 반겨주었다. 항상 그곳에 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던 존재가 사라져버린 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본가에서 나와서 자취방으로 향했다. 늘 자고 출퇴근하던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오니 방금까지 있었던 일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언제나처럼 본가에 가면 나무가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토록 분리된 나만의 공간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나를 지지해주었다.
다음 날에는 여자친구가 나를 보러 멀리서 와주었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자그마한 안식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그 다음 날은 여느 때처럼 출근을 했고, 그 다음 날은 친구를 만났다. 비일상을 가슴에 품고 일상을 겪으며 어떻게든 멀쩡한 척 살아보려 발악을 했다.
이 무렵 나는 죽음에 대해 새로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더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존재가 죽어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소멸되었을 뿐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무가 아직 존재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야만 했다. 분명 방금까지 따뜻하고 살아 움직이던 녀석이 겉보기에는 똑같은 모습인데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뛰어다닐 것이라는 예측에 처음으로 반례가 등장한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녀석이 뼛가루가 된 뒤에도, 그 작은 생명이 이토록 큰 변화를 거쳐 이 모양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심장이 멈춘 채로 누워있던 녀석은 분명히 나무였다. 그런데 이 한 줌의 가루는 나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내가 나무라고 부르던, 나무라고 알던 존재는 심장이 멈출 때에 사라진걸까, 아니면 가루가 되었을 때에 사라진걸까. 아니면 그저 다른 형태로 아직 존재하는 걸까. 나는 가장 마지막 결론을 지지하고 싶었다. 그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에게 녀석은 다양한 요소들로 정의되었다. 하얗고 고운 털, 맑은 눈망울, 개구쟁이같은 표정, 장난기있는 목소리, 엄청난 식성, 무거움, 털털한 성격 등등. 이것이 어쩌면 존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녀석은 심박을 멈추고 가루가 된 시점부터 그 본질을 이루던 특성들을 잃고, 따라서 내가 알던 나무가 아니게 되었으며, 존재가 소멸당한 것이다. 숱한 절망을 지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또 하나의 다른 진실도 발견하였다. 나를 포함해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기억 속에 아직 녀석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세상에 남아있는 한, 녀석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천국도, 지옥도, 강아지 별도 아닌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생각과 회상에 의해 새 생명을 얻어 숨쉬고 있는 것이다.
나무의 유골을 물에 흘려보내주고 싶다는 엄마의 바람에 따라, 우리는 아라뱃길로 갔다. 강물 앞에 서서 유골함을 집어들고 한 움큼씩 천천히 덜어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고통받던 녀석도 이제 없으니 최소한 살아서 힘들지 않으니 좋겠다. 녀석은 우리가 슬퍼하는 것을 알 턱이 없으니 고통만 없다면 죽는 입장은 편하겠구나. 남은 사람들이 힘든거지. 그래도 오래 살았다. 올 때가 있으면 갈 때도 있는거지. 16년 전 녀석을 처음 품에 안고 데려올 때에는 꽤나 무거웠는데, 지금은 뼛가루가 한없이 가벼워서 바람에 마구 흩날렸다. 유골함이 어느덧 비었고 오른손은 가루가 묻어 하얗게 되었다. 살짝 털어내었지만 완전히 닦아내지는 않았다. 이대로라도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2019년, 투병 2년차
 2019년, 투병 2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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