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에 짙은 구름뿐이던 어느 오후,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 식사와 함께하는 달콤한 휴식을 꿈꾸었다. 오늘 너무 돌아다녔고 또 한참 뛰었으니, 샤워하고 맛있는거 먹고 쉬어야지. 내일은 또 휴일이니 새로 나온 음악 들으면서 힐링해야겠다. 꽤 근사한 그림이었다. 누군가가 거기에 먹물을 뿌리기 전까지는.
여덟 바퀴 남짓 달리고 돌아와 바라본 벤치가 허전했다. 혹시 여기에 있던 물건 보신 적 있나요. 아니요. 아 혹시 여기 에어팟 보셨나요. 아뇨 못봤어요. 아 저 그 혹시 여기 물건 올려뒀었는데 보셨는가 해서요. 아니요 여기 아무것도 없었어요. 세상이 험하다 해도, 믿을 사람 없다고 해도, 의심보다는 신뢰가 좋았다. 그래서 믿었다. 카페에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를 놔두어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암묵적 합의를. 문 앞에 택배를 두어도 도난사고 한 번 발생하지 않는 모두의 약속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그것들은 나였고 나는 그것들이었다. 매일같이 지니고 다니는. 그래서 부재를 상상할 수도 없는. 그들은 마치 나의 분신 또는 신체의 일부였다. 그들은 나와 함께하며 같은 곳을 가고 같은 것을 보았다. 아침 일찍 산책하다 스치는 꽃향기에 뒤를 돌아볼 때에도, 점점 낮아지다가 이내 보라색 구름 속에 사라져버리는 해를 보며 울적함에 잠길 때에도, 지친 몸을 이끌고 자전거 위에서 초록 신호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 때에도, 어느 하나 나 혼자였던 순간이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귀에 걸려있던 에어팟 두 쪽. 돌아갈 집이 없어 굶어 죽을 일 밖에 남지 않은 불쌍한 고아들.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다. 제발. 결국엔 없다. 그저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어서. 이대로 천천히 꺼져가는 생명을 놓아줄 수 밖에 없어서. 이제 밤을 넘기고 나면 다시는 설정 창에서 에어팟의 이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따뜻한 위로로 나를 보듬어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도 생명은 닳아가고 있다. 다시는 채워지지 못할 28%를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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