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낮에 움직이고 밤에 생각한다. 밤이 없으면 생각할 시간도 없다. 너무 열심히 일에 몰두하느라 새벽의 사색도 포기했던 때, 내가 누구였는지 희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오랜 세월을 미루어 드디에 군에 입대했을 때,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새겼다.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리지 마.”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도 잊고 있다가 방금에서야 기억해냈다. 그렇다. 나는 나를 잃었다.

마음이 메말라버렸다. 나를 이루던 주된 감정들이었던 공감, 연민, 슬픔, 우울, 희망, 사랑, 절망 등등. 모두 어디론가 가버리고 남아있는 것이 없다.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정말 나에게 감정이라는게 있는 걸까? 의문의 나날들을 보냈다.

물음표도 없고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지만 아직도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이토록 “나”와 멀어지기는 처음이다. 그냥 되는대로 사는 것 같다. 아니, 살아지는 것 같다. 삶에 끌려다니는 노예가 된 것 같다.

오늘 사진을 받았다. 집에 돌아다니던 필름 한 통에는 2022년의 마지막이 들어 있었다. 그 사진들은 나의 가장 풍부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꺼내어 흩뿌려 주었다. 추억들은 밝은 대낮으로도 가릴 수 없이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잠시 눈이 멀었다.

그 때를 보고 지금을 보았다. 나는 나만 잃은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능력도 잃었다. 이제 나에게는 남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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