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이라는게 별 게 있나. 어쩌면 너무 평범해서 주변인은 물론이고 본인도 잘 모를 거다.
수렁이 있다. 여기에 빠지고 나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거기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것은 어렵다.
점점 내려놓는 것들이 많아졌다. 꿈과 이상을 포기하는 순간 죽는거라고 줄곧 생각해왔는데, 이 정의대로라면 난 이미 죽어 있다.
사실 죽은지 좀 된 것 같다. 원래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몸 아니면 정신에 상처를 하나씩 만들고 나온다. 나도 그렇다.
상처라는게 거창한게 아니다. 굳이 폭행이나 폭언을 당하지 않아도 생긴다. 좌절과 체념이 겹쳐 마음에 깊은 선이 남는 거다. 쇠사슬에 너무 오랫동안 매여 짓눌린 상처가 얼마나 아프던지.
어찌 보면 적응장애나 우울증으로 진단될 수도 있겠다. 남들은 모른다. 알리고 싶지도 않고 알려지고 싶지도 않다. 이해 가능한 영역도 아니고 공감하기도 어렵다.
어차피 우울은 티가 나지 않는다. 속이 아무리 썩어들어가도 겉으로는 미소를 달고 있거든.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중증 우울이 아닐 뿐.
내가 힘든 만큼 남들 더 챙겨주고 싶고, 내가 아픈 만큼 남들 더 위로해주고 싶어서 그냥 멀쩡한 척 사는 거다. 울고싶지 않아서 웃는 마음을 알까?
그러다가도 웃을 힘조차 없어 가끔은 쓰러지곤 한다.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지만, 그럴 시간도 장소도 없다. 빨리 추스리고 일하러 가야지. 좋은 모습 보여줘야지. 온전히 1인분 해내는 나여야 하니까.
모든 것을 빼앗겨 치밀어 올라오는 분노가 울분이 되었다가 슬픔을 넘어 좌절을 거쳐 체념까지 되어본 적 있는가? 끓는 화가 뼈와 살을 녹이는 고통을 매 순간 무의식도 아닌 또렷하고 날카로운 맨정신으로 겪어가면서 말이다.
화낼 수도 없다. 바뀌는 것도 없다. 그러니 포기한다. 대화도 안 통한다. 또 포기한다. 바쁘고 힘들다. 그렇지만 주저앉으면 안 된다. 맡은 바를 잘 해내야지. 울면 안된다. 일하러 가야지. 나는 완벽하게 해내야만 한다. 에너지가 없어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바닥까지 쥐어짜야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내 역할이니까.
이따금씩 다 내려놓고 싶은 충동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시야는 탁하고 앞이 잘 안 보인다. 정신이 흐리멍텅하고 늘 화나있거나 슬프거나 둘 중 하나다. 아무래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정상인을 연기중이다. 이게 잘 먹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대로 주욱 모를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어차피 떠날 것이다. 가까울수록 좋은 사람이 될 수가 없거든.
속이 썩어들어가든 말든, 누가 알고 누가 신경써주겠어. 어차피 멀리서 보면 그냥 그럭저럭 잘 사는 사람인걸. 누가 알아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그냥 이대로 사는거다. 불건강하지만, 그냥 살아지는 대로. 좋은 사람이 되어줄 수 없으면 혼자 생존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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