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두 개나 쌓인 군대 시리즈. 아무래도 군대 얘기는 꿀잼이 맞다. 전역도 안했는데 벌써 입이 근질거리는걸 보면(…)
작년 오늘은 기억에 남는 날이다. 당시 나는 이곳에서의 첫 하루를 보낸 뒤 일기를 쓰고 잠에 들어, 기억도 나지 않는 꿈을 꾸고 있었다. 오늘은 전입 1년 하고도 하루째 되는 날이다. 쓸데없지만 나중에는 기억도 나지 않을 지금의 생각과 감정들을 온전히 담아보고자 에디터를 열었다.
여기는 공무원 집단
이곳은 보통의 지상 정규군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군대보다는 회사에 가깝다. 기숙사 딸려있고 조직문화가 딱딱한 공기업 또는 공공기관, 그러나 연봉은 매우 매우 적은 그런 제3의 집단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맞다.
회사에 들어가서 신입 사원부터 시작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1년차나 2년차나 뭐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그러나 이곳에서는 1년 하고 9개월이면 커리어 통산 최고의 경력(?)으로 인정해주는 기간이기에 1년이면 꽤 길다. 시간이 정말 느리게 흐르기도 하고.
전입 초기까지만 해도 무력감과 허탈함에 많이 좌절했었다. 출근하면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서 일 배우기 바빴다. 나는 그저 최약체 이등병이었고 모든게 처음이었기에 적응하기 바빴다.
조직 융화성 관점에서 보면 당시 나는 이 곳에서 일을 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새로운 도전과 실패를 통해 배워나가고 조직을 개선시키고자 하는게 나의 비전이라면, 이 조직은 기존에 있던 것을 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다.
물론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아주 슬기로운 해결책을 찾았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될 것은 기존 멤버에게 위임하고, 나에게 온전히 권한이 있는 업무는 아주 기가막히게 자동화/고도화하는 것이다. “내 일이나 잘 하기” 전략이다. 일을 너무 대충 해도 문제이겠지만, 역시 남의 일에 너무 힘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사무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보이는 것들도 있다. 처음에는 마냥 꼰대같고 꽉 막힌 것 같았던 사람들도 완전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기도 했다. 어지간해서는 접하기 어려운 괴악한 인간 군상일지라도, 단편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되겠더라. 사람은 입체적이다.
생활 패턴
교대근무 특성상 잠 자는 시간이 뒤죽박죽이다. 언제는 낮에 자고 언제는 밤에 자게 된다. 여기에서 두 가지 길이 나오는데, 하나는 아침형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여 낮에 활동하고 야간 근무 때에 조금 늘어져 있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저녁형 인간으로 전환하여 해 떠있을때 졸리고 밤에 깨어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저녁형 인간이다. 아침형과 저녁형, 이렇게 두 선택지가 있으면 당연히 저녁형 인간의 삶을 택한다. 주간에 근무할 때 정말 기절할 것 같은 졸도감이 찾아오긴 하지만, 뭐 꾸역꾸역 버티는 거다. 이렇게 살면 새벽에 정신이 맑아진다.
새벽에 잠을 안 자고 정신 활동에 집중한다. 그러나 새벽 감성과 함께하지는 못한다. 왜냐? 이 방에는 나 말고도 7명의 사람이 더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람들과는 아끼고 신뢰하면서 잘 지내고 있지만, 본디 새벽 감성이란 혼자 있을 때에만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새벽 감성의 발동 조건 중 하나인 “감성 무드등”을 새벽에 켤 수 없기도 하다.
멘탈 케어
나는 근처에 사람이 있으면 “소통 가능한”(사회성 ON) 상태를 유지하려 애쓴다. 반면 혼자 있을 때에는 그러할 필요가 없어진다.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고, 마음에 돋보기를 가져다 대어 관찰할 여유가 생긴다. 이렇게 성찰과 명상의 시간을 종종 가지곤 했다. 입대 전에는 말이다.
다수의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혼자 있을 틈이 없어졌다. 친구들과 노는 건 좋은데 집에 가지 않고 600일동안 MT를 와있는 느낌? 일하고 떠드느라 바쁘다. 혼자 있기 어렵다 보니 자아성찰 같은 것도 할 틈이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 앞으로 가긴 하는데 눈을 감고 걸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눈 감고 걷다가 어다 부딪히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 비극은 여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연인 관계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가깝고 친밀한 사람일수록 더 바라는게 많고 기대감만 높아져서 갈수록 불만이 많아지는, 아주 간장종지만한 인품을 가졌다(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자주 나를 돌아보며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여기에서는 잘 안 된다.
이 문제로 올해 3월은 혼돈과 절망의 시간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걸 딱히 티를 낼 수도 없고 털어놓을 곳도 마땅치 않다는 것. 여기서 내 이미지는 무척 밝고 시끄럽고 천진난만한 사람이기에 이런 고민을 털어놓기가 더욱 망설여졌다. 생활관에서는 평소처럼 밝은 모습으로 살다가 연애 문제에 있어서는 지옥불에 퐁당 빠졌다. 여러 자아를 왔다갔다 하면서 사니까 좀 많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힘들면 동굴에 들어간다. 평소에 시끄럽던 녀석이 갑자기 안 보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면, 그건 높은 확률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준비중인 것이다. 결코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니 안심하시라. 이 와중에도 나를 기억하고 찾아와 안부 인사를 건네주는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
가라, 정치, 화술, 자기표현
바깥 세상 인연과의 고리는 하나씩 끊어져갔지만, 그런 와중에도 여기서 갈고닦은 어둠의 특기들이 있다. 이 문단의 제목에도 써있는 저 어지러운 단어들… 저것들이 나의 것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잠재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서도.
직업적 프로페셔널리즘을 가슴에 새기고서 내가 맡은 일은 철저하게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만, 되도않는 규정이나 악습들에 대해서는 뻔뻔한 가라로 대응하고 있다. 여기에서 아주 낯두꺼운 화술과 능글능글함이 필요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에 쓰면 안될 것 같아서 아쉽지만 넘어간다.
많은 사람이 24/7 상주하고 생활하며 일하는 곳이다 보니 고충이 정말 많이 생긴다. 가령 시설이나 휴가/외출 규정 등등.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여러 사람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면 대부분의 일들은 해결이 된다. 그러나 소박하고 어린 이곳의 사람들에게 이런 전투적인 일은 좀 어려운가보다. 그래서 내가 많이 하고 있다. 아주 합리적이고 사려깊은 언변으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마치며
전역자들이 마지막에 이르러 외치던, “ 시간이 빠르다 ”는 말은 거짓말이다. 시간은 힘들고 답답할수록 느리게 간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짧아보일 뿐. 지금도 이곳에 입대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 곧 올 사람들, 이미 와버린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고 싶다. 나에게도…
마지막으로, 내가 여기까지 심신이 나름 온전한 채로 올 수 있었던 건 나를 아껴주고 걱정해주는 분들의 애정과 격려 덕분이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도 그들 중 한 분일 것이다. 항상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그 마음에 보답하는 방법은 계속 연구 중이다. 앞으로 기대하셔도 좋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