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인생을 왜 사냐 묻는다면 아직 대답할 수 없다. 굳이 묻는다면 ‘태어났으니까 산다’ 정도일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냐 묻는다면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답할 것이다.
‘행복’은 삶의 목적은 아니지만 삶에서 반드시 추구하고 싶은 가치이다.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말은 이상하다. 삶이 시작된 이유는 ‘부모님이 강제로 스폰해서’이고, 삶의 목적은 각자가 살면서 정하는 것이다(물론 없을 수도 있다). 다만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므로(일단 그렇다 치자) 고통이 부재인 상태, 즉 행복을 좇는 것이다.
아무튼 행복하고 싶다.
행복의 원천
진화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다른 인간은 가장 소중한 자원이다. 그래서인지 사회적 교류를 할 때에 가장 큰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한 것 같다. 타인과의 교류가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인 것이다.
살짝 불공평하다. 사회활동(한국식 ‘사회생활’ 말고)에 능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행복을 얻을 기회는 전자에 쏠려버린 것이다.
나는 태어나보니 내향이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자라면서 사회성을 학습할 기회를 제공받지도 못했고, 감정적으로 위축되어 지냈다. 타인과 교류할 일이 거의 없었다. 남들은 다 가지고 태어나는 행복의 원천이 나에게는 없었다. 흑
왜 나는 햄보칼쑤가 업써!!
무채색 인생
마음이 도화지라면 최근 겪은 감정들은 물감이 되어 그 위에 칠해진다.
나는 혼자 놀 때 충전된다. 혼자 있을 때에 비로소 제자리인 것 같고, 마음이 진짜로 편해진다. 하얀 행복이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서 놀 때에도 좋다. 혼자 있을 때와는 다른 결의 행복을 느낀다. 파란 행복이다.
에너지가 한정되어서 혼자 노는 것이 더 편했고, 취미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없이 좋았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딱히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들여다 본 내 마음은 흑백 사진 같았다.
사회적 동물
에너지는 돈으로 비유할 수 있다. 지갑이 빵빵하면 행복한 것은 당연하다.
지갑이 빵빵해도 쓸 곳이 없으면 슬프다. 그렇다. 진짜 행복은 돈을 쓸 때에 온다.
쌓인 에너지를 인출해서 사회적 활동을 할 때에 가장 밀도높은 유형의 기쁨을 느낀다.
아무리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내향이어도 사회적 교류가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이다.
어릴 때에는 사회성 개발에 큰 관심이 없었다.
중간고사 후 친구들의 시험 점수를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하여 “너는 왜 주변에 관심이 없냐”는 소리를 듣긴 하였으나, 난 주변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묻고 싶었다.
삶의 중심이 철저히 나였고, 그 외의 것들은 딱히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스무 살이 넘어갈 무렵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인간관계의 범주가 넓어졌다.
그 전까지는 ‘나 아니면 남, 가끔 친구’였던 내 세상에 친구, 지인, 동기, 아는 선배, 친한 교수님, 선생님, 사장님, 학기친구, 비즈니스친구, 가끔 보는 친구, 아주 친한 친구 같은 존재가 생겨났다.
마음에 색이 들어간 물감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수다 떠는 재미도 알게 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도 하며 전에는 없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경험헀다.
그렇게 나 이외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인간 중독
사실 위의 것들은 보통 사람이면 사춘기에 접어들기도 전에 모두 경험하는 것들이다.
나는 사회와 반 고립된 상태로 어른이 된 것 같은데, 그래서 인간관계가 가져다 주는 기쁨을 꽤나 늦게 알아버렸다.
그런데 그런 긍정적인 감정들을 겪어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았다.
이거 갑자기 다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항상 따라다녔다.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
폭풍 전 바다는 늘 고요하니까
- 혁오, TOMBOY
근데 가끔은 너무 행복하면 또 아파올까봐
내가 가진 이 행복들을 누군가가 가져갈까봐
- 볼빨간 사춘기, 나의 사춘기에게
기쁨에 도취되면 그 상태가 좋으면서도 어딘가 제자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불안한 것이다.
원래 회색이어야 할 내 마음이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 차는 것이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결국 몇 번의 좌절을 겪은 후에는 인간관계 자체에 회의감이 들어 위와 같은 행복의 상태를 ‘인간 중독’이라고 부르기에까지 이르렀다.
에너지 관리
나는 내가 무한동력기관인 줄 알았다. 그저 밥 잘 먹고 하고 싶은 것 하며 살면 이대로 주욱 괜찮을 줄 알았던 것이다.
친구를 포함한 인간관계를 스스로 개척해야 할 시점이 오자 그 환상이 끝났다.
딱히 주변에 관심 두지 않고 살다 보니 어느 순간 고립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것은 아주 아픈 과정을 통해서였다.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온 몸을 잠식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람이 그리워짐을 느꼈다.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한 가지 배웠다. 나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다.
돌아보면 여태까지 에너지와 열정을 쏟았던 일과 시간들 뒤에는 언제나 곁에 사람이 있었다. 친구였든 누구였든.
말랑말랑하고 금방 녹아내릴 것만 같이 유해보이는 그런 온정과 관심이 나를 살게 만들고 강하게 만든다.
세상이 차갑다지만 따뜻한 곳은 있다. 그 곳으로 가기로 했다.
스트레스 관리
예전에 잠깐 일을 할 때가 생각난다. 조금만 마음이 불편하면 얼굴이 뜨끈뜨끈해지며 집중력이 크게 감소하곤 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진정 동하면 그 누구보다도 기가막힌 생산성을 보여주지만(?), 그게 멘탈 상태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에게 있어 일터의 환경은 마치 지옥과 같았다.
돈과 권력관계가 형성된, 노동자가 약자인 공간에는 도처에 나를 거슬리게 하는 요소들이 깔려 있다.
맘에 안드는 상사, 쏟아지는데 하기는 싫은 일, 휴일에도 언제 올 지 모르는 전화… 어우 끔찍하다.
저기서 살아남아야 한다.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생산 활동에서 온다. 서민으로 태어난 이상 필연적 과정이기 때문에 피할 수는 없다.
나는 두 가지 접근 방법을 택했다.
하나는 소프트 파워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환경으로 내가 이동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맷집을 기르는 것이다.
사실 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이야기한다. 세상은 원래 차갑고 그걸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이 크기도 하고, 맷집을 기르는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 다 어려운 선택지다. 전자는 뛰어난 능력과 섬세함을 요구하고, 후자는 고통을 요구한다(…).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전자가 나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곳에 있어야 한다. 나는 워낙 특이해서 맞는 곳이 별로 없긴 하겠지만 있긴 있을 거다.
마치며
참 신기하게 자랐고 신기한 성향을 가진 마이너한 사람이다.
주류에 편입된다거나 유흥의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다름의 아름다움을 알거나 작은 것에 집중할 줄 알게 되었다.
나같은 성향의 사람도 어디 발붙이고 살 공간이 어딘가에는 있다고 믿고 있다.
정말 다행인 것은 나에게 매우 대치되는 성향이 적당히 균형을 이뤄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자아 분열인가 싶기도 했는데, 요즘은 다양한 도구가 들어있는 툴박스 같다.
이제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툴을 꺼내는 것만 익히면 된다.
그럼 어디든 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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