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시차

들어가며

대학교 1학년이던 2017년에 우원재의 시차가 발표됐다.

로꼬와 GRAY가 피쳐링했다.

시간과 장소

관찰이라는 이벤트가 발생할 때에 그 대상을 묘사하고자 한다면 그 위치 뿐만 아니라 시간 또한 필요할 것이다.

이벤트는 금방 지나가고, 보통 그 찰나의 인상만이 눌러앉아 기억의 한 조각이 된다.

기억을 하나씩 톺아보면 그곳에는 새벽이 있고, 밤이 있고, 아침이 있다.

장소의 이름만큼 시간의 이름 또한 기억을 회상함에 있어 주요한 요소인 것이다.

공간의 민낯

낮에 해가 있다면 밤에는 가로등이 있다.

번화가의 밤거리를 보고 감탄했다가, 다시 아침에 같은 곳을 보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시간의 변화는 시계바늘의 움직임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태양의 위치가 바뀌고, 기온이 바뀌고, 채도와 조도 또한 바뀐다.

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모든 감각기관이 생생하게 체험한다.

시각은 이 곳을 같은 공간이라 말할 지 몰라도 그 고요함과 쓸쓸함, 피부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은 마치 전혀 다른 곳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낮의 공간과 밤의 공간은 분명 매우 다르게 다가온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어둠과 눈을 마주치면 세상은 그 민낯을 드러낸다.

혼란이 가라앉고 고요한 그 곳에서는 혼자서 생각에 빠져드는 것도 자유다.

바뀌어버린 낮과 밤

밤은 모두가 잠들었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한 시간이다.

깨어있는 사람이 철저히 소수자가 되지만, 그러면서도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자유와 솔직함, 어딘지 모를 쓸쓸함에 끌려 새벽을 연장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 낮을 소비하게 된다.

내 방에는 LED 보조등이 있다. 따뜻한 촛불 색이다.

창 밖을 비추는 가로등과 같은 색이다.

조명이 새벽을 밝히면 고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정적 그 자체가 좋다. 감각들이 불필요한 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일몰 후 일출 전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되었다.

나의 시차

밤새 모니터에 튀긴 침이 마르기도 전에

첫 줇부터 내 얘기다.

고등학교 때에 프로그래밍을 처음 접한 이후로, 낮에 일정이 있어도 열정에 불타 밤을 새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오전 오후를 밀어내고 삶의 중심이 되었다.

성취에 도취된 촛불 빛깔의 시간들이 진짜 내 삶이고, 따분한 학교 같은건 그저 살기 위해 가는 그런 것이었다.

시험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돌아오면 보통은 휴대전화를 조금 만지다가 잠들기 마련인데, 어느 날들은 그러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아 계속 무언가를 끄적였다.

하루 밤을 새면 빌드 넘버가 100 정도 올라가 있었다. 그걸 들고 학교로 가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곤 했다.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진짜 공부는 늘 새벽에 일어났다. 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것도 좋지만, 하나 하나 삽질해가면서 배워가는 것은 새벽이 없으면 안된다.

적게는 6시간, 많게는 10시간도 벌어지는 시차를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처음 들었을 때부터 가사가 참 반가웠다.

나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게 나도 모르게 위안이 됐다.

마치며

지금 떠올려 보는 지난 새벽들에는 낭만이 서려 있다.

막 동이 트는 시간, 오늘의 감각도 언젠가는 아련한 기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희미해져 멀어지기는 해도, 잊지는 못 할 것 같다.

우린 아무것도 없이 여길 올라왔고, 넌 이 밤을 꼭 기억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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